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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갈등 - 식모살이가 싫어서 시집왔어엄마와 딸 2021. 4. 6. 11:53반응형
*엄마를 원망하는 글을 계속 써놓고 보니 마음이 안 좋다. 좀 편해지자고 쓴 글이지만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있기에 유치한 나의 모습은 영원히 박제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한다.
엄마는 남쪽지방 가난한 농부의 일곱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쯤 엄마가 나고자란 시골집에 갔었다. 울타리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진 초가집 앞으로 밭이 있었고 초가집 뒤로는 듬성듬성 큰 나무들이 황토색 흙위에 서있었다.
밭 한쪽 옆에 변소가 있었다. 나무와 짚으로 대충 지어진 넓은 변소에는 돼지 한 마리가 줄에 묶여있어서 볼일보러 갈때마다 꽤액 꽤액 울어댔다. 무서워서 변소를 못가자 할머니께서 밭에다 그냥 보라고 하셨다. 외할머니댁에서는 하루종일 생고구마를 먹고 설사한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이런 초가집에서 나고 자라서 아홉살에 작은 아버지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입하나 덜자는 것이었는데 아홉살 먹은 엄마는 아직 자기 몸단장도 정갈하게 못하는 단발머리 계집아이였다. 부모와 떨어져 남의집 살이를 가는데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고 한다. 그정도로 철부지 어린 나이였던 것이다. '제발 누가 나 좀 봐줘요'하는 엄마의 기본 정서는 이때 형성된 것이다.
식모살이 들어간 집에는 간난아기가 있어서 어린 엄마는 그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는 진짜로 식모일을 하게 됐는데 이때 작은어머니한테 많이 맞았다고 했다. 물을 길러오다가 반쯤 흘리고 오면 작은어머니가 막 때렸다는데, 오랜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이야기를 자주 한걸 보면 엄마 인생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던가 보다.
납치당한 것도 아닌데 엄마는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대 때는 그런 자기 팔자를 체념하는게 당연했었나보다. 그냥저냥 작은집에서 스물세살이 되도록 있었고 작은아버지 내외는 엄마를 중매서기 시작했다. 그때 몇 명의 남자를 선보았는데 하필 아빠를 선택한건 아빠가 장남이어서 책임감 있는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빠 직전에 선본 남자와 결혼했어야 한다고 엄마는 종종 아빠앞에서 후회의 말을 했다. 아마도 엄마는 식모살이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살림을 꾸려 남편과 알콩달콩 사는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서둘렀을 것이다.
아빠는 엄마와 같은 고향 사람이지만 가족들이 전부 서울로 터전을 옮긴 집의 장남이었다. 서울에 집 한채를 장만한 후 그 집에 일곱남매가 옹기종기 벌어먹고 살았다. 이 집이 엄마의 시집이었다. 이 집도 기억이 나는데 앞채와 뒷채가 나뉘어진 이상한 구조의 집이었다. 앞뒤 합해 세가족이 따로 살수있게 세개의 부엌을 중심으로 공간이 나뉘어져 있었다.
앞채의 마당 한켠에는 텃밭과 (또!) 변소가 있었는데 세가족이 살수있게 큰 집이었지만 변소가 하나뿐이었다. 진짜 무서운 변소였다. 초등학교 방학 때 이 집에 한달간 놀러가 있었는데 구더기들이 꾸물거리는 변소앞에서 오래된 책을 찢어 부드럽게 만드느라 비벼대면서 제발 변의가 사라지기를 바랬었던 기억이 난다.
이 집에서 시작된 엄마의 시집살이는 엄마의 기대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장남에게 의지하는 시어머니와 그밑으로 결혼 안한 동생들이 줄줄이 달린 집이었으니 얼마나 일이 많았을까. 식모살이가 싫어서 결혼했지만 엄마는 다른 집에 들어가 새로 식모살이를 하는것 같이 느꼈다. 엄마의 결혼생활이 조금 나아진 것은 분가해서 우리식구만 따로 살게 됐을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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