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임금이며 천재인 세종대왕님은 한글을 만들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한나절이면 깨우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하셨더랜다. 그런데 한글이 쉬운 글자체계임에도 환경때문에 까막눈이 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다. 깡촌에서 나고자랐던 엄마는 줄줄이 달려있는 동생들을 보는게 주 임무였다. 아홉살에 작은아버지 집에 식모로 들어간 엄마는 학교에 갈 수 없었고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채로 성인이 되었다.
엄마는 소위 까막눈이었는데, 까막눈 컴플렉스가 너무 심해서 자식을 셋이나 기르면서 한번도 자식들 학교에 온 적 없었다. 글 못 읽는게 티날까봐. 그래서 고입상담 때도 아빠가 학교에 오셨었다. 아빠가 상담오는게 매우 드문 일이어서 나는 좀 창피했었다.
엄마는 은행이나 관공서에도 가지 않았다. 뭔가를 써서 내야하기 때문에 은행일이나 관공서에 가는 일도 아빠 몫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병원도 아빠가 데려갈 때만 갔다. 가난한 집에서 크느라 글을 못 깨우친게 무어 그리 창피할까 싶었다.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중년의 엄마가 대답했다.
"나보다도 훨씬 늙은 할머니가 글씨를 척척 쓰는 걸 보니, 까막눈인거 진짜 창피하더라"
중학교 1학년 때 초경이 시작된 후로 나는 줄곧 생리통에 시달렸다. 심하게 아팠기에 약국에서 파는 이부프로핀계 진통제를 먹었는데 알레르기 반응이 심해서 아주 혼이 났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고 얼굴이 선풍기처럼 부었다. 그후로는 한달에 한번씩 오는 통증의 시간을 그냥 이악물고 버텄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생리통을 참다 못해 엄마에게 제발 병원에좀 데려가 달라고 했었다. 엄마는 인상을 쓰다가 마지못해 병원에 데려가 주었다. 접수창구에서 무슨 창피를 당했는지 엄마는 기분이 상해있었다. 주사를 맞고 겨우 진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앞뒤로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는 내 뒤통수에 대고 마구 퍼부어댔다.
"남들 다하는 멘쓰하면서 저렇게 유난을 떨고 지랄을 하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엄마는 '달거리'도 아니고 '월경'도 아닌 멘쓰라는 단어를 썼다. 지금도 뭔가 어둠의 여운이 남는 단어다. 그당시 엄마의 욕설을 들었을 때는 엄마한테 미안했다. 까막눈이라 공장아니면 밭일밖에 구할 수 없던 엄마의 고단한 일상을 알았기에, 엄마를 쉬지도 못하게한 게 미안했었다. 그런데 내가 딸을 낳고 그 딸이 초경을 시작하고 보니 옛일이 새삼 서러웠다.
내딸의 초경 때 우리 부부는 마카롱과 프리지아 꽃을 사서 기념해 주었다. 그것의 거추장스러움과 고생을 생각하면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녀석의 성장을 축하해주고 추억을 만들어 주고싶어서 준비한 거였다. 프리지아 꽃을 사면서 엄마가 내뱉었던 비수같은 말들이 생각났다. 나의 고통에 너무도 무심하고 거칠었던 엄마가 지금도 야속한 생각이 든다.
나의 고생은 타이레놀과 함께 끝이났다. 고등학교 졸업후에 타이레놀이 국내 시판되면서 한달에 한번 겪었던 지옥이 사라졌다. 내 인생을 전과후로 나눈 최초의 사건이 타이레놀의 등장일 줄이야! 정말 감사하고 감사한 약이다. 그리고 몇년전에 엄마는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한글을 깨우치셨다. 이젠 엄마도 까막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