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택시 여대생 사건, 범죄 피해에서 살아남기 전략

포항 택시 여대생 사건, 범죄 피해에서 살아남기 전략

Only the paranoids survive.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앤디 그로브라는 헝가리 출신의 미국 기업가는 이런 책을 썼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에 개인이 가져야할 전략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책 제목을 보고 내 20~30대가 생각났다. 나는 체격이 작고 겁은 많아서, 성범죄의 대상이 되지않고 살아 남기위해 '모든 남성을 의심하는 전략'을 가지고 살았다. 내 피지컬이 론다로우지(격투기 선수) 같았다면 좀 더 편하게 인생살았을 것이다. 왠만한 남자는 일대일로 붙었을 때 때려눕힐 수 있으니까.

내 전략의 예를들면 낯선 남자와 단둘이 엘리베이터 타지 않기, 밤길 걸을때 뒤에 남성이 걷고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남성의 뒤로 가기. 택시를 혼자 탔을때 아빠에게 전화해서 큰소리로 통화하기 등등. 이렇게 해서 무사히 30대를 거쳐 중년에 이르렀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읽었는데 남성들은 이런식으로 의심을 받는 것을 매우 억울해 했다. 당연하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내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믿고 살다가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과하게 의심해서 살아 남는게 훨씬 좋은 전략이다. 한마디로 여자들 입장에서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 지점이 분명 있다.

그래서 포항 여대생 택시 사건을 접했을때 가슴이 너무 아팠다. 홀로 탄 택시가 행선지와 다른 길로 빠르게 달리고 있을때 그 여학생이 느꼈을 공포에 공감해서 그렇다. 도로가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택시기사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생긴 참사인 것 같다. 아직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수 없다. 여학생은 공포속에 패닉상태가 된 나머지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 같다. 딸을 기르는 입장에서 정말 마음이 아프다.

론다로우지/나무위키

딸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무렵무터 학교에서도 아동범죄 피해를 예방하기위한 교육이 활발히 진행됐다. 거기에 더해 나의 '편집광적 전략'까지 딸아이에게 전수되었다. 낯선사람과 엘리베이터 타지 않기, 길에서 도움 요청하는 낯선 사람 무시하기, 동네 어른한테 인사할때도 거리를 충분히 두기, 가족구성원이 확인되지 않은 친구집에 가지 않기 등등.

이것은 주변의 모든 성인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두고 의심하는 전략이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지나친것 같은 이 전략을 나는 딸에게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요새 부정적인 단어가 돼버린 페미니즘과는 무관한 생존전략일 뿐이다. 요즘 유행하는 Girl can do anything 을 지지하는 쿨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이번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일베성향의 특정 세력이 이대남이라고 과잉대표되던 것이 수정되었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추구하는 그 세력은 2번남이라고 다시 명명되었고 억울하게 이대남으로 같이 묶여있던 온전한 젊은 남성들이 자유로워졌다. 나는 1번남들이 여성이 처한 이런 현실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2번남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늘 화가 나있어서, 남의 처지를 공감해주지 못할 뿐만아니라 조롱의 태도로 일관한다. 혐오를 부추기는 2번남에게 마땅한 이름을 부여한 것이 이번 대선에서 의외의 수확이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범죄피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하는 몇가지 전략이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론다로우지가 되는 거지만, 선택지가 많이 없어서 택한 '편집광 되기'는 부작용이 있다.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새끼고양이처럼 예민하게 털을 세우고 살아야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포항 여대생의 안타까운 사연때문에 머리속이 더욱 복잡한 날이다. 공포속에 목숨을 잃은 여학생의 명복을 빕니다.